한 해가 저무는 산골의 보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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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무는 산골의 보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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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다. 밤이 깊으니 보이는 것이 죄다 깊다. 깊은 마당, 깊은 나무, 깊은 돌담. 깊은 마당에 빠져, 깊은 나무에 빠져, 깊은 돌담에 빠져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한밤중 잠 깬 나는 잠에서 점점 멀어진다.

 

한밤중 깨어 시골집 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고, 마당의 감나무를 보고, 감나무 너머 돌담을 보고 있으니 집 전등은 모두 꺼졌지만 깜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집 안팎이 모두 훤하다. 잠에서 막 깬 이에게 지금이 낮이라고 해도 속을 만큼.

 

지금은 새벽 두 시, 집 전등은 꺼졌고 보이는 등불은 고작 셋이다. 마을 초입 가로등과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저수지 건너편 외딴집 등불, 저수지 수면에 비쳐 일렁이는 불빛까지 합해 셋이다. 셋은 드문드문 떨어졌고 집에서 멀다. 그러므로 등불이 비춰 훤한 게 아니다.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는 요즘, 오늘따라 집 안팎이 저리 훤한 건 달빛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이 보름 무렵일 게다. 정확하게 헤아려보진 않았지만 며칠 전이 음력 열흘이었으니 보름이거나 하루 앞뒤일 것이다. 보름이나 하루 앞뒤는 달이 가장 둥글어지려고 하거나 가장 둥글다가 기울어지는 때라 달빛도 가장 밝다.

 

 

나를 깨운 건 실은 저 달빛이었다. 한밤중 누군가가 몸을 흔드는 기척에 눈이 떠졌다.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든 달빛이 머리맡 물잔을 달그락달그락 흔들어 댔고, 깊게 잠든 나를 밀고 당기며 흔들어 깨웠다. 얼핏 눈뜨니 바깥이 훤했다. 날이 밝은 줄 알았다. 두 시를 가리키고 있던 시계를 보고 오후 두 시인가 했다.

 

오후 두 시 같은 새벽.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길어질까 겁부터 난다. 산골은 다 좋은데 지나치게 하루가 길다. 매화나무에 달린 매실을 헤아리고 헤아려도 여전히 그날이 그날이고,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헤아리고 헤아려도 여전히 그날이 그날이다. 산골의 하루는 지나치게 길게 느껴진다. 길고 긴 산골의 하루는 그래서 더 더디게 가고 심심할 때가 많다. 무엇을 자꾸 헤아려보는 건 더디고 심심한 하루를 보내면서 터득한 생활의 지혜다.

 

씨가 날아와 마당에 제멋대로 핀 민들레를 헤아리며 살아오면서 겪은 슬펐던 날들과 기뻤던 날들을 헤아려본다. 끝까지 간 적은 없다. 헤아리다간 관두고 헤아리다간 관둔다. 다 헤아려본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헤아리다가 깜빡 놓치고 헤아리다가 깜빡 놓치는 까닭이다. 헤아리기엔 민들레가 너무 많고 헤아리기엔 슬펐던 날들에서 기뻤던 날들에서 아주 많이 지나왔다. 슬펐던 날들, 기뻤던 날들, 그런 날들에서 아주 많이 지나온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사람의 한평생은 슬픈 날만 있는 게 아니고 기쁜 날만 있는 것도 아니란 걸,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아주 많은 날이 지나가면 슬픈 날도 기쁜 날도 평생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걸….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달빛이 밝을까, 햇빛이 밝을까? 밝기야 햇빛이 열 배 백 배 밝겠지만 깊기로 따지면 달빛이 열 배 백 배 더 깊다. 단 몇 초도 쳐다보기 힘든 햇빛에 비하면 달빛은 깊숙한 속마음까지 다 드러나게 한다. 햇빛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달빛은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달이 움직인다. 아까보다 서쪽으로 더 갔다. 마루에 앉으면 달은 처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데 움직이는 건 어찌 아는가. 그림자 위치가 아까와 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까는 감나무 그림자가 내 쪽이더니 지금은 동쪽으로 더 갔다. 그러면서 달과 그림자는 감나무를 가운데 두고 일직선상에 나란히 있다.

 

매사 그렇다. 달을 보지 않아도 달이 보이듯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은 여기 없는 당신. 당신도 그렇다. 보지 않아도 당신이 다 보인다. 당신은 서쪽으로 조금 더 가고 나는 동쪽으로 조금 더 갔다는 걸.

 

그러면서 당신과 나는 일직선상에 한 방향으로 나란히 있다는 걸.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마루. 춥지 말라고 통유리 둘렀어도 연말을 앞둔 이 겨울 한밤의 한기를 어찌 당해내랴. 그래도 달빛에 붙들리면 달아날 재간이 없다. 달빛이 제풀에 지쳐 물러날 때까지 노닥거려 주어야 하고 ‘그렇지, 그렇지’ 맞장구쳐 주어야 한다. 그래야 달빛 마음에 들고 달빛 눈에 든다.

 

 

달빛도 눈이 있다. 영롱하기로 따지면 천하제일일 텐데 그런 달빛이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 상대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달빛은 단박에 안다. 어떤 날은 아예 안 뜨고, 뜨더라도 구름으로 가려서 못 보게 한다. 달빛에 눈이 있는 까닭이다. 보름달은 몇 배나 까탈스럽다. 눈밖에 나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다시 마당을 본다. 얼마나 훤한지 마당 감나무 나뭇가지가 다 보이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낙엽이 다 보이고 마당에 드리운 나뭇가지 그림자가 다 보인다. 달빛이 물러나려면 아직 멀다. 심심하기는 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더 심하다. 이럴 땐 필요한 게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나뭇가지가 몇이나 되나 헤아리고, 낙엽이 몇이나 되나 헤아리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몇이나 되나 헤아린다.

 

달빛 훤한 마당은 온통 나뭇가지 차지다. 보이는 건 많지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건 나뭇가지다. 나무를 봐도 구부러지고 깡마른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오고, 마당 바닥을 봐도 길쭉하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많던 이파리 죄다 내려놓고 비로소 안식에 든 나뭇가지. 달빛도 그것을 알아 나뭇가지를 집중 조명하고 나뭇가지 그림자를 집중 조명한다.

 

마당에 나가볼까 하다가 참는다. 달빛이 나를 집중해서 비출까 싶어서다. 달빛이 조명하면 나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지난 10월 ‘김민부문학상’을 받으러 갔을 때처럼 목소리가 떨릴까.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떨리는 소리가 나올까?

 

달빛 아래 서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어떤 일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다. 조명 받고서 떨릴 일이 없으니 오늘밤도, 가는 해도 가만히 바라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밤이 깊어가고 한 해가 깊어간다. 마당이 깊어가고 나무가 깊어가고 돌담이 깊어간다. 어디 보이는 것만 깊어가랴! 보이는 것도 깊어가고, 보이지 않는 당신도 깊어가는 산골의 보름밤.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서야 달빛을 뿌리치고 잠이 들려나.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질 것 같다.

 

 

동길산(시인)

 

부산에서 태어나 1992년 경남 고성 산골로 이사해 도시와 산골을 오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해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우두커니》 등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냈습니다. 2020년 ‘김민부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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