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남편을 처음 만난 2019년 5월. 필리핀 날루수안 섬은 꿈처럼 아름다웠다. 낯선 타인이었던 그와 나는 3박 4일 동안 반짝이는 웃음을 푸른 바다에 더하며 가까워졌지만, 정작 우리를 연인으로 만든 것은 서울에 돌아와 마주한 서로의 깊은 상처였다. 자신은 감추며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려는 숱한 대화에 공허해졌던 내게 인생의 가장 아픈 이야기를 들려준 남편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내 마음을 열고 들어온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아버님과 처음 만났다.
어떤 만남은 이별 후에 시작된다. 아버님은 남편이 나를 만나기 5년 전, 세상과 이별했다. 필리핀 보홀에서 스쿠버다이빙 강사로 교육생들을 가르치던 남편은 너무 아파 감기약을 먹고 일찍 잠들었다 깬 새벽에 아버님의 부고를 접했다. 아침 배를 타고 세부에 도착했지만, 한국행 비행기를 밤까지 기다려야 했다. 남은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목 놓아 울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후,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충분히 슬퍼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강한 애도의 기간을 보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어 무너지지 않으려 다잡던 그의 마음은 건강한 애도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지 오래였다. 다행히도 나를 만난 후, 우리는 함께 울고 웃으며 아버님을 추억하기 시작했고, 아버님은 내게도 가장 그리운 사람이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막혀있던 하늘길이 다시 열리고, 2년 만의 해외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보홀이었다. 아름다운 해양 공원 발리카삭의 한 다이빙 포인트에서 내 키의 두 배를 훌쩍 넘는 부채산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빙워크를 탄 것처럼 꽤 강한 조류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기에 산호를 지나가며 감상했다. 그런데 산호의 뒤편에서 자신을 밀어내는 조류와 싸우며 바위를 붙잡고 산호를 촬영 중인 남편을 발견했다. 조류는 거스르는 게 아니라고 농담처럼 자주 얘기했던 남편이었는데.
‘분명 저 산호에게 무언가 있을 거야!’
궁금해진 나는 몸을 돌려 그에게 돌아가려 핀을 찼지만, 조류는 나보다 힘이 셌다. 나는 다시 조류 방향으로 흐르며 서서히 그와 멀어졌다.
6년째 운영 중인 유튜브 수중 채널 <송현C필름>의 편집은 전적으로 내 몫이라서, 나는 남편이 촬영한 영상도 모두 확인하며 영상 리스트를 작성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풀페이스 마스크는 얼굴 전체를 덮어 수중에서 말을 할 수 있고 음성이 카메라에 꽤 선명하게 담기는데, 한 영상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송현아, 아빠 산호다. 이게 아빠 산호야.”
그가 사용한 360도 카메라에는 촬영자와 피사체 양면이 다 담긴다. 그에게서 멀어지는 나를 붙잡으려 손을 뻗지만, 조류에 흘러가 버리는 나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아빠 산호로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이 산호와 함께 담겨있었다.
“아빠 잘 있었어? 나는 잘 지내요. 보고 싶어요.”
아버님을 보내고 여러 사정으로 보홀에 돌아온 그는 이 커다란 부채산호를 못 보고 부딪힐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데 부채산호가 남편을 포근하게 안아주며 위로하는 느낌이 들어 그때부터 그 산호를 ‘아빠 산호’라고 부르며 안부를 물었단다. 혹시나 산호가 다쳤거나 사라졌으면 내가 속상해할까 봐 미리 말하지 못했다고. 이 오랜만의 만남이 너무도 소중해서 그는 멀어지는 날 잡지 못했을 거다. 평소와 달랐던 그의 모습에 더 세심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도 미안했다.
그동안 그렇게 아버님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버님을 모신 곳에 갈 때면 왜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빨리 떠나려는 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아마도 남편은 작은 비석보다는 이렇게 살아있는 커다란 생명의 모습으로 아버님을 추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운 아버님과의 만남이 담긴 나의 첫 책을 읽고 어머님과 아가씨는 많이 우셨다고 했다. 내게는 정말 살가운 남편이 시댁 식구들 앞에서는 과묵해지는데, 말없이 견뎌내던 그의 마음이 내 글로 조금은 표현됐을까. 나를 만나기 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외로운 남편의 마음을 안아주었던 아빠 산호와 바다에 감사를 전한다.
늘 그리운 아버님, 다음에도 크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1982년 출생.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수료. KBS 32기 공채 아나운서. <검사 프린세스><로맨스가 필요해><감자별> 등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 출연. PADI 글로벌 홍보대사. 스쿠버다이빙 강사로도 활동 중. 저서로는 <이제 내려가 볼까요?>(2024).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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