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웅진지식하우스
- 도서명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인력거는 (친구의 이름이다) 문 대신 창문으로 출입하는데,
내 친구 인력거에게 방을 구경시켜달라고 하면 그녀는 “너 담 잘 넘니?” 하고 묻는다. 인력거(친구의 이름이다)의 방문은 피아노로 막아두어서 열 수 없다. 인력거는 문 대신 창문으로 출입하는데, 창문은 부엌 베란다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창문을 열면 쌀과 세탁기가 보 인다. 그녀는 쌓아올린 책을 발판 삼아 밟고 창문을 넘는다. 때 마침 쌀을 푸러 베란다에 나온 엄마는, 가방을 멘 쌀도둑을 보고 놀라며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인력거는 달아난다.
그녀가 방문을 피아노로 막은 이유는, 피아노 연습에 집 중하기 위해서이다. 피아노 연습을 안 하고 자꾸 거실로, 밖으 로 나가는 자신에게 피아노 연습을 강제하기 위해 문을 아주 닫 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한번 외출할 때 가급적 짐을 많이 싸서 나가고 (다시 들어오는 게 힘드니까), 방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게 힘드니까) 생사고락과 취사를 방에서 해결한다.
피아노 전공생으로, 피아노는 그녀의 전부이다
문이 언제든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 었다. 인력거는 피아노 전공생으로, 피아노는 그녀의 전부이다. 아니, 떡 진 머리와 피아노가 그녀의 전부이다. 그녀는 둘을 제외한 삶의 변수를 원치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피아노 연습과 떡 진 머리만으로 이루어진 하루를 소망한다.
인력거는 자신이 휘둘리기 천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 방에서만 피아노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녀의 기분을 망치는 것은 너무 많다. 그녀에게 외출은 변수로 만들어진 작은 폭탄이다. 인력거는 귀가 예민한 자로, 세상의 소음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녀가 연습실을 꺼리 는 이유는, 그녀가 옆방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피아노 연주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력거는 자신이 휘둘리기 천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 방에서만 피아노 연습을 한다.
자신을 방에 가두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의 피아노 연습법이었다
그러면, 방에서 닥치고 피아노만 치면 될 텐데, 웬 유난이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피아노가 그녀의 전부인 것에 비해, 그녀가 노는 것을 너무 사랑한다는 점이다. 인력거는 너무 쉽게 방을 나간다. 물론 방을 나가면 피아노 연습 시간이 줄고 자책만 늘었다. 게다가 한번 외출하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르는데, 이때 쓸데없는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방에만 있으면 사람을 만나 들뜰 이유도 없고, 누군가를 만나 후회할 일도 없으며, 혈중 사람 농도가 낮아져 차분하게 피아노 연습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꾸 까먹 고 밖을 기웃거렸다. 그래서 인력거는 자신에게 피아노 연습을 강제하기 위해, 그리고 외부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방에 가두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의 피아노 연습법 이었다.
요컨대, 그녀가 방에서 하는 일은 사실 피아노 연습이 아니라 방 안 나가기 훈련인데, 이 둘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며칠 전 인력거에게 요강을 추천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예전에도 요강을 추천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일전에 고시원에 살 때, 복도 끝에 공용 화장실이 있었다. 그런 데 겨울엔 춥고 무서워서 요강을 썼다. 마침 인력거는 외부 연습실에서 살고 있었는데 내가 요강을 추천했던 것이다. 당시 인력거가 다니던 지하 연습실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건물 2층으 로 올라가야 볼일을 볼 수 있어서 새벽에는 사용하기가 꺼려졌 던 것이다. 그래서 인력거도 요강 동지가 되어 작은 요강을 하나 장만했다.
그녀는 정사각형의 작은 연습실 구석에서 도자기 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요강을 바라보면 ‘한 줄기의 가느다란 빛같은 비참함’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비참함은 요강에 오줌을 눌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화장실에 요강에 든 오줌 을 버리러 갈 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지하 연습실의 복도를 지날 때, 옆방 드럼 연주자나 성악 전공자와 마주칠까 벌벌 떠 는 것이다. 이때, “요강 안에 든 건 오줌이 아니다. 라면 국물이다” 하고 속으로 세 번 외치면 두려움이 반감될 수 있다.
그녀는 지금 방에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를 위해 방음 옷을 발명하고 싶다. 방음 옷을 입으면 아무것도 들 리지 않는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장착했기 때문이다. 방음 옷을 입으면 폭탄이 터져도 아늑하게 들린다. 밖에 있어도 방 안에 있는 기분을 낼 수 있다.
